밥상을 차리다가도 문득 고개가 끄덕여지는 뉴스가 있다. 얼마 전 본 기사 하나가 그랬다. 집단수용시설 피해자들이 개별 소송을 치르지 않아도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특별법을 만들어 달라는 목소리였다. 한겨레의 보도는 그들의 오랜 투쟁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보여주었다. 피해자들은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는데, 다시 소송이라는 무거운 문을 두드리게 하는 현실이 참 무겁게 다가왔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멀고도 가까운 존재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일상에서 법을 의식하며 살지만, 정작 법의 문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누군가는 태어나면서부터 법의 보호와 사각지대 사이를 오간다. 특히 집단수용시설의 피해자들은 사회와 단절된 채 지내다가, 밖으로 나온 뒤에도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조차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왔다.
집단수용시설의 역사는 우리 사회의 그늘진 부분이다. 과거에는 사회적 약자나 장애인, 고아, 그리고 가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시설에 수용되었다. 그러나 시설 내부에서는 인권 유린과 학대가 만연했고, 사회와의 단절은 그들의 목소리를 묻어버렸다. 피해자들은 시설에서 나온 후에도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정상적인 삶을 살기 어려웠다. 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국가의 관리 실패와 제도적 방임이 낳은 결과다.
이번 특별법 촉구는 단순히 보상금 문제를 넘어선다. 이는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이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상징적인 행위다. 개별 소송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정신적 소모가 크다. 피해자들은 이미 충분히 지쳤다. 그들에게 또다시 법정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자신의 아픔을 증언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중의 고통이다. 그래서 특별법이 필요한 것이다. 개인이 아닌 국가가 나서서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보여달라는 것이다.
법의 역사를 돌아보면, 권력에 맞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현실에서 법은 때로는 강자의 편에 서기도 한다. 공인 명예훼손 소송에서 언론이 승소하는 비율이 2016년 이후 낮아졌다는 매일경제의 분석은 그런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언론의 보도 자유가 넓어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권력자들이 법을 이용해 자신의 평판을 지키려는 시도가 더 치열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법정은 진실을 밝히는 곳이어야 하는데, 때로는 전략과 계산이 오가는 전장이 되곤 한다.
이런 현상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경우에도 공인 명예훼손 소송에서 원고가 승소하려면 실제 악의(actual malice)를 입증해야 하는 높은 장벽이 있다. 그러나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권력자들이 언론을 견제하려는 수단으로 법을 악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법이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시민사회의 감시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다.
이 모든 흐름 속에서 우리는 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나는 집에서 살림을 하며 디지털 도구를 정리할 때도, 복잡한 문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임을 깨닫는다. 법도 마찬가지다. 일반인이 법률 조항을 이해하고 소송 절차를 밟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개인적인 아픔을 안고 법정에 서야 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럴 때는 민사소송변호사와 같은 전문가의 조력이 큰 힘이 될 수 있다. 그들은 복잡한 절차를 대신해 주고, 법적 언어를 우리말로 풀어 설명해 준다. 하지만 그런 도움조차 받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법률 서비스는 자본과 정보의 격차에 따라 접근성이 크게 달라진다. 고소득층은 최고의 변호인단을 고용하여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지만,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는 법률 구조 공단이나 공익 변호사에게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도 법률 구조 공단의 지원은 한정적이며, 대기 시간도 길다. 집단수용시설 피해자들의 경우에는 더욱 열악한 상황이다. 오랜 시설 생활로 인해 사회적 네트워크가 부족하고, 경제적 기반도 약한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개별 소송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권리를 포기하라는 것과 다름없다.
집단수용시설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드러낸다. 그들은 수십 년간 격리된 생활을 강요받았고, 그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그들에게 법적 절차를 요구하는 것은 가혹하다. 국가가 나서서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야 한다. 특별법 제정은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싸우지 않아도 되도록, 사회가 함께 책임지겠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고 배상한 사례들은 그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어 왔다. 독일은 나치 시절의 만행에 대해 지속적인 사죄와 배상을 통해 신뢰를 회복했다. 일본의 경우에도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책임은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한국 사회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집단수용시설 피해자 문제는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배상하는 책임을 다할 때만이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는 교훈을 준다.
법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을 끊임없이 고쳐 나가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오늘의 촉구가 단순한 외침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피해자들의 이름이 법적 절차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그들의 아픔이 보상으로 이어지기를. 그리고 우리 사회가 그들의 목소리를 더 이상 외면하지 않기를.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TV 뉴스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바람이라는 것을. 법이라는 울타리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감싸주는 날이 오기를, 조용히 기대해 본다.